【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무학 자초의 출생의 미스테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무학 자초는 조선 건국에 이바지했던 조선의 초대 왕사(王師)였다. 이와 같은 그의 위상과 달리 그의 출생과 신분은 밝혀진 것이 없다. 특히 그가 서얼이나 천민 출신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낮은 신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음을 보여줌으로서, 무학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더욱 드러내고자 한 의도도 있을 것 같다는 예상도 했다.다음 미스테리는 무학 자초의 행적이다. 특히 조선 개국 전까지의 무학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을 소개하기 전
고려 말 조선 초에 왕조가 교체되면서, 더불어서 유교와 불교가 교체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1) 그런데 유교와 불교의 교체가 당연한 것이었을까? 성리학은 승려와 사찰이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서 농장을 확대하고 사치를 부린다는 등의 부패를 지적했다. 이것을 통해 성리학으로 대체하기 위한 당위와 명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전에 1000년이 넘게 백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됐고,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를 한 번에 위축시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학은 고려의 불교를 유지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대표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는 우리가 흔히 무학대사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중등교과 과정을 비롯해서 역사 과목에서 우리는 무학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무학대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만큼 무학대사의 생애와 행적에 대하여 남아있는 기록이 적다는 의미이다. 역사적인 인물이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은 고대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고대의 인물의 경우 대부분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나 개인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의 종교지형을 한 마디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단(異端)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했고, 사찰의 수를 인위적으로 줄였으며, 조선 중·후기에는 가정의 의례까지 대 성리학자인 주희(朱熹)가 쓴 책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의례를 보급했으니 이 말이 맞게 보일 수도 있다.이러한 조선시대의 모습 이면을 조금 자세히 보면 조선조에 불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역대 왕 중 일부는 현대 학계에서 불교 신앙을 가진